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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ject  :  무라카미 하루키, 왕가위의 90년대..






대학시절에 썼던 글이다.
왜 썼는지는 잘 기억이 안난다.
그냥 막연히 써보고 싶어 썼던 것으로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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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 왕가위의 90년대

내가 중국에 간 것은 1996년 8월이었다. 나름대로 중국어 공부를 하자고 굳게 마음먹고 갔던 터라, 우리말로 씌어진 것이라곤, 여행책자 한권과 성경책 뿐이었다. 한달이 지났을 무렵, 친구에게서 라면 한 박스와 함께, ‘새책 소식’이라는 조그만 책자가 배달되어 왔다. 보고 싶은 책을 써 보내면, 중국으로 부쳐 주겠다는 말과 함께. 내가 고심 끝에 주문한 책은 F. 사강의 ‘브람스를 좋아하세요’와 투르게네프의 단편집, 그리고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였다. 그러나 마지막 책이었던 ‘상실의 시대’를 선정하기 까지는 적잖이 망설여졌던 것이 사실이다. 그 망설임의 이유는 의외로 간단한 것이었다. 우리나라에서 지나칠만큼 인기가 있다. 그것이 나를 끝까지 갈등에 빠지게 만들었다. 요컨대 통속 소설은 읽지 않겠다는 것이 당시, 나의 자존심이었고, 소위 베스트셀러로 이름을 날리던 책을 들추어 보았을 때의 실망감이 마찬가지로 선택을 주저하게 만든 것이다. 실제로 그무렵 인기를 끌던 ‘좀머씨 이야기’를 비롯한 ‘쥐스킨트 시리즈’는 그 내용과 소설적 구성의 진부함과 지루함에도 불구하고 상위에 랭크 되어 있었고, 난 그것을 작품의 승리가 아닌, 화려한 양장과 출판사 기획의 승리로 생각하고 있었을 정도였다.
하지만, 책이 일단 배달된 후, 상황은 과연 이상한 쪽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내가 읽고 난, 책들을 사람들에게 빌려 주기 시작했는데, ‘상실의 시대’는 단연 가장 인기가 있었다. 나로서도 읽고 난 후, 딱히 이 책을 ‘연애 소설’로 치부해버리기 어려운, 뭔가 개운치 않은 느낌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한국에 돌아온 후로, 하루키의 책을 찾아 읽으며 그 앙금의 정체를 파악하려 노력했다. 그리고 그 시작은 또 한축에서 비슷한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던 왕가위에게 까지 이어지게 되었다. 서로 다른 매체로 대중의 사랑을 받고 있지만, 그 둘에겐 어떤 공통점이 있음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멜로 영화를 찍고 싶은 예술가

잘 알려진 대로 왕가위는 시나리오 작가였다. 그가 쓴 작품으로는 담가명의 ‘최후승리(87)와 신조협려(91)등이 있고, 직접 감독으로 연출한 작품은 ’열혈남아(89)‘, ’아비정전(90)‘, ’중경삼림(95), 동사서독(95), 타락천사(96), 춘광사설(해피투게더 97)이 있다. 이른바 그 작가를 알고 싶으면 처녀작을 살펴보면 된다는 말처럼, 그의 첫 영화 ‘열혈남아’에는 그의 영화 철학을 관통하는 일관된 맥이 흐른다. 내용적인 면에서는 우선 연인간의 사랑을 기본으로 하고 있고, 흑사회로 불리는 폭력적인 배경이 존재한다. 형식적인 측면에서는 스텝 프린팅과 핸드헬드 기법, 또는 피사체를 왜곡시키는 어안렌즈 등의 사용으로 시각적 이미지를 중시 한다는 점과, 빈번한 음악의 사용을 들 수 있다. 연인(장만옥)과의 약속을 어기고, 죽음을 각오하고 떠나가는 유덕화와 장만옥이 헤어지는  버스 장면은 앞으로 그의 영화에서 빈번이 등장하게 될 ‘의사 소통 부재’의 은유이며, 삐삐나 핸드폰, 팩스 등 통신기기가 중요한 소품으로 다루어 지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이다.
한국에서 왕가위 신드롬을 일으킨 영화는 ‘중경삼림’이었다. 그 영화를 보고 나온 많은 젊은이들은 모두가 입을 모아 신선하다고 했고, 영화 잡지들에서도 비중있게 ‘중경삼림’에 대한 영화평을 실어 주었다. 그들에게 이른바 신선한 인상을 남긴 것은, 경쾌한 음악과 빠른 화면처리, 리듬감 있고 감각적인 대사와 가벼운 사랑이야기였다. 이 영화의 성공이후에 ‘타락천사’와 ‘동사서독’이 연이어 개봉관에 걸리게 된다. 타락천사는 중경삼림과 비교할 때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영화이다. 감독도 원래 중경삼림에 세가지 에피소드를 싣는 옴니버스 영화를 기획했으나, 그것을 유보하고, 마지막 이야기를 따로 떼어내, 타락천사로 만든 것이다. 당연히 촬영의 방법이나, 그 내용과 스타일에 있어, 전작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 이어 개봉된 ‘동사서독’은 감독이 시간적 편집을 거부하고, 이미지적 편집을 시도한 덕분에 이야기 구조가 대단히 난해한 영화였지만, 왕가위의 팬들에게는 변함없는 사랑을 받았다.
그럼 이즈음에서 이런 질문을 제기할 법하다. 도대체 왕가위 영화 인기의 비결은 무엇일까?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우선 왕가위 영화의 상업적 측면을 살펴 보아야 한다.
왕가위는 철저하게 홍콩의 스타 시스템을 활용한다. 그의 처녀작부터, 해피투게더까지 모두 홍콩의 일급배우라고 할 수 있는, 유덕화, 장국영, 양조위, 장만옥, 임청하등이 출연한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관객을 흡인할 수 있는 매우 든든한 보험과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이러한 스타시스템의 활용에 대해서, 단지 그들이 뛰어난 배우이기 때문이라고 일축하고 있지만.
둘째, 사랑 이야기를 축으로 한다. 그의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주된 테마는 남녀간의 혹은 동성간의 사랑이다. 멜로 영화가 일정한 수의 여성 관객을 늘 확보 할 수 있듯이, 우리 모두는 사랑이야기를 듣고 싶어하고, 그 안에서 카타르시스를 느끼려 한다.
셋째, 음악의 효과적 사용이다. 인기를 끌게된 중경삼림을 선두로 해피투게더까지 영화 음악은 왕가위 영화에서 중요한 하나의 스타일을 형성하고 있다. 많은 관객이 ‘뮤직 비디오’처럼 영화를 받아들이게 되는 것도 이 점 때문이며, 스타TV나 M-TV등으로 뮤직비디오에게 익숙한 세대에겐 대단한 효과를 발휘 할 수 있다.
넷째, 화려한 영상을 들 수 있다. 카메라는 불안정하게 움직이면서도, 절묘한 각도로 화면을 잡아낸다. 동사 서독이 복잡한 편집을 위해 스토리적인 요소를 포기했다면, 대신 더 화려해진 영상미로 관객을 붙잡았다.  
마지막으로 감각적인 대사처리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시나리오 작가 출신답게, 젊은이들의 화법을 간결하면서도 감각적으로 엮어냈다.
그러나 앞서 밝혔듯, 우리의 목표는 이들 영화가 갖는 상업성 적인 측면만이 아니라, 손 쉽게 이 영화를 멜로 영화나, 홍콩 느와르 또는 무협 SF영화 등의 상업영화로 규정하기 어렵게 만드는 이유는 무엇인가하는 것이다.  
가장 큰 이유는 왕가위 영화들을 담고 있는 틀의 고급스러움 때문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틀이란, 스토리를 찍어내는 방식과 편집의 방식등 주로 기술적 측면과 관련된 것을 지칭하는 것이다. 이른바 왕가위의 전매 특허가 된 스텝 프린팅과 핸드헬드(들고 찍기), 그리고 광각렌즈 사용과 불안정한 카메라 워크 혹은, 짧은 프레임 편집과 극단적으로 긴 롱테이크의 사용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기법들은 주로 실험영화나, 과거 장뤽 고다르 시대의 예술영화부터 시작된 촬영 기법들이다. 일반적인 상업 영화에서는 거의 사용되지 않던 기술이, 그의 손에서는 화려하게 꽃을 피우고 있는 것이며, 의외로 관객들은 아무런 거부감이 없이 그런 것들을 소화해 내었다. 영화의 편집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옴니버스 형식의 중경삼림과 타락천사부터, 이야기들이 대사를 사이에 두고, 토막 토막 단절되었다가 붙여진, 동사서독과 해피투게더까지 일반 상업영화가 꺼려하는 편집방식을 대담하게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바로 여기에서 일어난다. 내용면에서는 상투적인-혹은 상업적인-이야기를 담고 있으나, 그 형식면에서는 고급 예술 영화 형식을 띄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관객들과 까다로운 영화 평론가 모두를 만족시키는 현상이 일어나게 되었다. 관객이 많이 드는 영화는 대중 상업 영화이고, 고급 예술 영화나, 실험 영화는 결코 인기를 못얻는 다는 통설을 보기 좋게 무너 뜨린 것이다.
그렇다면, 우린 어쩔수 없이 다시 혼란한 질문을 던지게 된다. 그렇다면, 왕가위의 영화는 대중 상업 영화인가? 예술 영화인가?
그 연장선상에 함께 서 있는 무라카미 하루키를 이야기하고 그 질문에 답을 해보자.

‘상실의 시대’와 ‘노르웨이의 숲’ 사이.

왕가위와 마찬가지로 무라카미 하루키의 처녀작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를 살펴 보는 것으로 이야기를 시작해 보자. 그 작품의 오프닝은 다음과 같은 아포리즘 식의 어구로 시작된다.
“이 세상에 완벽한 문장이란 존재치 않아. 완벽한 절망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이 말은 우리가 하루키 읽기를 하는데 있어서 대단히 의미심장한 단서를 제공해 준다. 즉 문장에 대한 고민, 또는 문체에 대한 고민은 바로 작품의 스타일과 통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하루키는 실제로 그의 수필집에서 ‘문체가 작품을 결정한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바람의 노래를....’과 그 연작 ‘1973년의 핀볼’은 문체면에 있어서, 이미 하루키만의 확고한 방향성을 띄고 있다. 왕가위가 스텝프린팅과 독특한 편집방법 스타일을 구축한 것과 마찬가지로 냉소적이면서도, 감각적인 비유는 하루키 고유의 스타일로 굳어졌다. 일반적으로 통속 작가들에겐 뚜렷한 문체가 없는 것이 일반적이다. 특히 대표적 대중 소설인, 무협지나 최근 인기를 끌고 있는 환타지 문학에 있어선 더욱 그러하다. 반면, 하루키는 자신 고유의 감각적인 문체를 갖고 있는 것이다.
하루키가 완성도 있는 문체의 소유자라는 것과 동시에, 하루키 작품을 통속과 순문학의 경계를 오가게 하는 것은 그의 문단데뷔 경력 때문이기도 하다. 하루키는 1979년 대중 소설에 주는, 군상 신인 문학상으로 문단에 나왔다. 양을 둘러싼 모험이 노마 문예 신인상을 수상하고, 뒤이어 나온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가 환타지 문학의 일면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칼융’의 정신 분석 이론에 근거해 ‘자아 찾기’의 행로를 뛰어나게 묘사하여 좋은 평가를 받게된다. 그러나 ‘노르웨이의 숲’으로 큰 인기를 끌면서, 다시 통속 작가 논란이 불거지게 된다. 이 작품은 서정적이면서도 감상적인 사랑이야기를 그 주 내용으로 하고 있다.
그런데 내가 중국에서 이 소설을 읽고 무언가 주춤거리게 만들었던 그 무엇이 이 소설에는 여러곳에 숨어 있다. 그것은 하루키의 소설에서 주위를 떠돌고 있는 과거 흘러간 노래와, 소설가들, 그리고 이념들이다. ‘상실의 시대’에서 주인공이 친구를 사귀게 된 계기는 ‘위대한 게츠비’를 세번 읽었기 때문이고, 그것이 천재로 묘사되는 인물과 ‘친구가 될 수’ 있었던 유일한 이유였다. 그리고 일본에서 70년대에 있었던 전공투 운동에 대해서는, ‘여자 치맛속에 손 넣을 생각이나 하던 한심한 녀석’들이었다고 신랄한 비판을 퍼 붓는다. 이러한 냉소적이고 탈이데올로기화 된 자세와, 아아무도 거들떠 보지 않는 책 한권이 할부가 되어 친구가 된다는 것은, 고도 자본 주의를 살아가는 인간에 대한 메타포로 읽혀 질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천천히 처음의 질문으로 다시 돌아가 보자. 과연 왕가위는, 또는 하루키는 예술쪽에 가까운 작가들일까, 상업문화에 가까운 작가들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과연 그들은 어디쯤에 서있는 것일까?

고급문화와 대중문화는 과연 존재 하는가?

왕가위가 되었든 하루키가 되었든 이들을 정의하려 한다면, 지금까지 써왔던 고급문화, 대중문화의 정의가 선행될 필요가 있다.  
로웬탈에 따르면 ‘현대문명의 기계화된 작업과정에서 개인의 지위가 하락함에 따라, 대중문화가 출현하여 민속예술이나 고급예술을 대체하게 되었다. 대중문화 상품은 진정한 예술의 특징을 전혀 갖고 있지 않으며, 그 대신 그 다양한 표현형태에 있어서 표준화, 규격화, 보수화, 허구성, 그리고 조작된 소비재로서의 특징을 갖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대중문화에 대한 이러한 비난은, 당연히 고급 문화와 대중 문화의 개념을 상정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그의 개념정의는 대중 문화가 예술의 형태를 갖고 있지 않으며, 표현 형태에 있어서도, 표준화, 규격화, 보수화, 허구성, 소비재의 성격을 갖는다고 정의한다. 고급문화는 반대의 성격을 띤다. 이러한 명확한 구분은, 그러나 모더니즘 시대에 존재했던 구분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지금 현재의 예술, 혹은 대중 문화는 그 구분이 모호할만큼 대단히 복잡한 형태의 변형을 겪으며 발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들어, 표준화와 규격화의 모습을 대중 문화가 갖는 것은,  소비재로서 더 많은 사람들에게 판매되기 위함이다. 그러나 이른바 고급 예술이라 불리워지는 장르에서도 대중문화에 못지 않은 밀리언셀러가 탄생한다. 파바로티의 음반과 안느 소피무터의 바이올린 콘체르토 시리즈는 단기간에 수백만장에 가까운 판매고를 올리고, 우리나라에도 잘 알려진 움베르트 에코나 밀란 쿤데라의 소설 역시 비슷한 인기를 얻는다. 요컨대 과거에 존재하던 대중 문화와 고급 문화의 구분은 이제 그 어떤 형식이 되었든 정의를 내리는 데 곤란을 겪을 수 밖에 없다. 이것은 왜 그럴까? 그 시작에 자본이 있었음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후기 자본주의 사회에 편입된 대중문화와 고급 예술을 생각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포스트 모더니즘과 마주하게 된다. 그러나 포스트 모더니즘이 갖는 의미는 또한 대단히 다양하다. 그 예로 헵디지의 견해를 살펴보자.
‘ 포스트 모던’ 이라는 것이 방의 장식이나 건물 디자인 뿐만 아니라, 영화, 음반의 제작, 실험비디오, 텔레비전 광고, 미술 다큐멘터리나 이들 사이의 ‘상호 텍스트’적 관계, 패션잡지나 비평 전문지의 페이지 디자인, 인식론에 있어서 반목적론적 경향, 존재론적 형이상학에 대한 공격, 감각의 일반적인 약화, 전후 베이비 붐 세대가 중년의 환멸을 맞이하는 집단적 절망과 병적인 현상, 반성성의 곤경, 수사학적 형용, 표피성의 증식, 상품 물신주의에서의 새로운 단계, 이미지나 부호, 스타일에 대한 매혹, 문화적 정치적, 실존적 파편화의 과정과 그 위기, 주체의 탈중심화, 대서사에 대한 불신, 의미의 내파, 문화적 위계 질서의 붕괴, 핵파멸의 공포, 대학의 쇠락, 마이크로 테크 놀로지의 기능과 영향, 미디어로 향한 사회경제적 전환, 소비주의와 다국적 단계, 터의 상실이나 그 자체의 포기 혹은 일반적으로 시간성의 축대신 공간성의 축이 대치되는 것에까지 모든 것을 다 일컫는다면, 이것이 분명 대단한 유행어라는 사실이 확실해 진다. 이런 다양한 의미를 갖고 있음에도, 의미를 한정시켜서 바라본다면, 포스트 모더니즘은 고급 모더니즘 범주의 경직성을 거부하는 세대로부터 나왔다고 할 수 있다. 고급문화/대중문화의 구별에 집착하는 것은 늙은 세대의 고루한 사고 방식으로 간주되었고, 이러한 경계의 함몰은 탈장르나 고급 문화와 대중문화와의 만남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즉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대중문화와 고급문화’의 뚜렷한 구분이라는 대서사가 붕괴되었다는 데 동의하는 것이다. 이로 인해, 포스트모더니즘의 주요 특성이라고 할 수 있는 혼성모방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포스트 모더니즘은 상업 문화이고, 자본주의를 조롱하는 모더니즘과 달리, 포스트 모더니즘은 그에 저항하기보다는 소비자본주의의 논리를 복제하고 재생산하며 또 보강할 뿐인 것이다. 더 나아가 포스트 모던 문화는 후기 자본주의 논리를 단순히 복제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이를 더욱 보충 강화 시킨다. 이것은 예술의 생산도 일반적으로 상품생산에 통밯되는 과정의 중요한 부분이 된다는 것이다. 이제 문화는 더 이상 자본주의 사회의 경제행위를 은폐하는 이데올로기가 아니며, 그 자체가 경제적 행위가 되었다.

글을 맺으며....

이런 시점에서 바라 본다면, 왕가위의 영화나, 하루키의 소설이 갖는 의미는 자못 명확해 진다. 즉 포스트 모더니즘 사회에서는 고급 과 대중 문화의 경계가 무의미하며, 더 나아가 문화 영역과 경제행위의 영역 사이에 있는 구분조차 없어지고 있는 것이다. 왕가위 영화가 철저히 상업적인 스토리를 갖고 있으면서도, 형식과 틀을 예술적이고 실험적으로 꾸미는 것도, 사실은 문화 소비의 욕구를 가지고 이미 공룡처럼 커버린 대중의 욕구에 영합 하려는 의도이기도 한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문화를 상품화하여 기호가 고급스러워진 대중에겐 더 이상, 어설픈 혹은 완전히 대중적인 싸구려 냄새가 풍기는 영화엔 흥미가 없는 것이다. 이것은 자신만의 독특한 스타일과 문체를 가지고 연애 소설을 써내는 하루키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요컨대 포스트 모더니즘의 세계에선 대중문화와 고급 문화의 구분이 존재하지 않고, 따라서 왕가위와 하루키의 작품들 또한 대중문화냐 고급문화냐로 재단할 수 없는 것이다. 결국 처음에 내가 품었던 질문들과 의구심은 왕가위와 하루키를 거쳐, 후기 자본주의 사회의 이데올로기로 떠오른 포스트 모더니즘에 향하게 된 셈이다. 우리는 상품으로서의 문화와 문화로서의 상품 사이에서 방황하는 세대이며, 그 끝에는 왕가위와 하루키가 서 있는 것이다. 그리고 오늘도 우리는 그들을 소비하며, 그 속에서 어떤 의미를 찾으려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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