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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UEST 2
 

name  :  snowcountry
homepage  :  http://www.musenote.com
subject  :  (글) 설국 여행기
눈 - 1

지난 번 일본에 갔을때 일입니다.

전 금성 출판사 문학전집 1978년도판 한 권을 들고, 신주꾸에서 북쪽 니가타 현으로 떠나는 기차에 올랐습니다. 기차안에는 스키 여행을 떠나는 몇 명의 젊은 연인과 벌써 부터 졸기시작한 사람들이 드문드문 앉아 있었습니다.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듯한 어린 차장이 검표를 해주는데, 소매는 검게 때가 타 있었습니다. 흥청거리는 후기 자본주의 일본 저너머 어딘가에 살고 있는 듯한, 근면한 인상의 친구 였습니다. 저는 니가타현의 중심도시인 니가타까지만 여행을 해야 했기 때문에, 쉽사리 잠을 잘 이룰 수 없었습니다. 도착 예정시간은 새벽 4시 30분 쯤.

어떤 꿈을 꾸고 있다고 느꼈는데, 웅성거리는 소리에 눈을 뜨고 말았습니다. 니가타가 가까와 오고 있었습니다. 니카타 역은 니카타 현의 수도라고 하기에는 그닥 규모가 크지 않았습니다. 새벽 시간에는 차도 별로 다니지 않았고, 식당들 역시 문을 닫은 상태였으므로, 난감했습니다.




책을 다시 펴니, 눈에 뒤덮힌 커다란 산봉우리 세개가 흑백 사진 속에 빛나고 있었고, 그 앞으로는 조그만 마을이 허리띠처럼 둘려 있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이곳에 갈 수 있을까 하다가,문득 기차 노선표를 다시 보니, 에치고 유자와 마을이 뜻밖에 기차 노선도에 나와 있었습니다. 사람들에게 물어 확인을 해보니, 저는 바로 그 역을 지나쳐 온 것이었고, 그 책에 적혀 있는 니카타란 니가타 시가 아닌, 니가타 현을 지칭하는 것이었습니다.

매표소에 가서, 이야기를 하니, 지나온 역을 다시 갈 수 있는 무료표를 끊어 주었습니다. 다시 플랫폼으로 나갔고, 날씨는 생각보다 추웠습니다. 새벽차를 기다리는 사람은 몇명 없었습니다. 젊은 아가씨와 담배를 피우고 있는 아저씨가 몸을 움츠린 채 기차를 기다리고 있었을 뿐입니다. 나는 아가씨에게 기차를 어디에서 타면 좋을 지 물어봤습니다. 그 아가씨는 영어를 잘 못알아 들었지만, 본인과 같은 차라는 것을 알려 주었습니다.

지방 국철은 차 문이 미닫이로 되어 있어서, 사람이 밀어야 열리게 됩니다. 국철은 천천히 미끄러져 나갔고, 저는 깍아 놓은 얼음 같은 푸른 어둠속을 물끄러미 응시하고 있었습니다.

맞은편 좌석에 앉은 아가씨는 가끔 얼굴이 마주칠때면, 녹는 얼음처럼 희미한 미소를 지어 보였습니다. 전 그 미소를 어디선가 본듯해, 기억을 더듬어 보았지만, 이내 다시 따뜻한 잠속으로 빠지고 말았습니다.

차의 규칙적인 덜컹거림은 심장박동처럼 부드럽고, 듣기 좋았습니다. 얼굴이 따갑고, 눈을 뜨지 못할 만큼 강렬한 빛이 내 몸에 내리 쬐고 있었습니다.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떠보려 했지만, 계속 눈물이 흘렀습니다. 한참만에 차창을 바라보자, 하얀 설원이 지구끝까지 펼쳐져 있었습니다.

국철이 덜컹거리며, 지나는 곳은 2 미터 높이로 쌓인 눈길 이었습니다. 느릿느릿 움직이는 차창 밖으로는 작은 집들이 검게 눈속에 박혀 있었고, 독수리 두마리가 별일 없다는 듯 기차만큼 커다란 날개를 펴고, 눈 위를 낮게 날고 있었습니다.

국철이 가는 길은 점점 좁아져, 열차가 다닐 만큼의 공간 만 남기고, 양쪽 창은 눈의 장막으로 막혀, 시야가 가려져 버렸습니다. 에치고 유자와 마을이 가까와 지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에치고 유자와의 유키구니(雪國)  



눈 - 2

처음부터 무턱대고, 니카타현으로 발길을 돌리게 된 것은 아닙니다. 그 이야기는 약 3년전으로 거슬러 올라 갑니다.

저는 아직 대학생이었고, IMF로 원하던 어학연수도 가지 못한채 하루종일 빈집에서 잠을 자거나, 책을 읽거나, 어항 속의 열대어들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지내고 있었습니다. 당시 읽은 솔벨로우의 '허공에 뜬 사나이'처럼 전 그렇게 인생이 허공에 매달린채 하늘거린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개인적으로도 많은 힘든 일이 있었고, 머리속으로 구름이 몰려 온다 싶으면, 산허리에 걸린 도로위를 땀으로 흠뻑 젖을때까지 뛰고 또 뛰었습니다.

그날도 여느날처럼 전 방에 누워서, 신문을 뒤척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여름의 특집기사라기엔 좀 재밌는 사진이 실려 있었습니다. 가파른 산등성이 위에서, 사람들이 두터운 스키복을 입고, 신나게 활강하는 사진이었습니다. 그 특집기사는 세계의 여행지를 소개하고 있었는데, 올 겨울 여행지로, 바로 니카타를 추천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곳이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쓴 설국의 무대가 되는 곳이라는 설명도 빼놓치 않았습니다.

전 잠시동안 사진에서 눈을 뗄 수 없었습니다. 눈으로 뒤덮힌 가파른 산봉우리와 눈속에서도 푸르게 빛나는 일본 소나무. 그리고 그 속에선 조용하면서도 가늘게 유키코의 슬픈 노래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여관 창문을 열고 몸을 반쯤 내놓은 채 창틀에 매달려 하얀 김을 뿜는 코마코의 불그레한 볼과, '아무것도 해줄게 없어'라는 권태로운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는 시마무라의 시선은 어쩐지 나를 향한 것만 같았습니다.

그들의 모습을 보는 순간, 저는 스스로에게 약속을 하고 말았습니다. 돈을 벌게 되는 순간부터 3년안에, 내 모든 저축과 시간을 털어넣더라도, 반드시 그곳에 가겠다고...... 허황된 꿈이고, 다소 비현실적인 이야기일지라도 내 젊은 날의 어느 날은 반드시 설국에 있겠노라고......



'현 접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니 雪國이었다' -川端康成의 '雪國' 첫번째 문장 中

낡은 책뒤의 사진과 너무나도 똑같은 산세가 내 두눈속으로 달려들었습니다. 그것은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보았고, 코마코가 보았고, 20여년전 사진작가가 보았고, 그리고 내가 보게 된 산이었습니다. 거짓말처럼 아무것도, 심지어 작은 마을의 위치까지도 변하지 않은 말 그대로의 산이었고, 전 차창에 쌓인 눈과 그너머의 산과 말없이 내려다 보는 하늘을 보고 있었습니다.

전 제 가엾은 젊음의 어느날을 설국에서 보내게 된것입니다.  

눈 - 3

에치고 유자와 ...

에치고 유자와...





전 커다랗게 쓰여있는 역이름을 그렇게 두어번 불러보았습니다. 눈은 제 키만큼이나 높이 쌓여 있었지만, 작은 도로위는 깨끗이 치워져 있었습니다.

우선 방을 구해야 했지만, 빠듯한 예산이 맘에 걸렸습니다. 하지만, 다행히도 니가타역 플랫폼에서 노선을 물어보았던 아가씨가 친절하게 제게 말을 걸어 주었습니다. 언어소통이 안되어 여행내내 걱정하던 제게는 너무나도 고마운 친절이었습니다.

아가씨는 제가 원하던 일본식 방을 역앞 관광안내소에서 찾아 주었습니다. 그 관광안내소는 작고, 깨끗했습니다. 사무실 안쪽에선 따뜻한 난로가 놓여 있었고, 벽에는 설국으로 들어오는 현 접경의 터널 바탕에, 흰 글씨로 설국의 첫 구절을 적어 놓은 포스터가 걸려 있었습니다. 카운터 옆 서고에는 일본어 문고판 설국이 나란히 꽂혀 있었습니다. 저는 그 문고판 책과 엽서 두장을 사서, 가방에 넣었습니다.

저를 도와준 아가씨는 도쿄에서 일하는 간호사였고, 그때는 마침 친구들과 북쪽에서 스키를 타고, 다시 도쿄로 돌아가는 길이었습니다. 어깨까지 흘러내린 차분한 머리에, 크고 선한 눈매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녀의 고향도 이곳 일본의 북쪽 어딘가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겨울이 되면, 고향을 찾아가는 철새처럼 북쪽으로 올라 온다고 했습니다. 그녀는 도쿄행 기차를 갈아타려면 세시간 정도 시간이 있으니, 괜찮다면 안내를 해주겠다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가와바타 야스나리 박물관을 찾아갔습니다. 작은 3층짜리 건물이었는데, 지하부터 3층까지가 모두 박물관이었습니다. 지하에는 소설 속 주인공들이 처음 만나게 된 여관방 모습과 사진이 걸려 있었습니다. 그리고 3층엔 과거 설국에 살던 사람들의 생활상을 찍은 사진과 농기구, 겨울철 살림살이 등이 진열 되어 있었고, 한편엔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전기 영화 감상실이 있었습니다.



박물관과 영화 감상실 모두 우리 두 사람 밖에 없었지만, 박물관 관리원 아저씨는 단 두사람을 위해서 영화를 돌려 주었습니다. 무슨 이야기인지 알아 듣지는 못했지만, 마음 한쪽이 따뜻해 지는 듯 했습니다. 아가씨와 저는 서로 말이 잘 통하지 않았기 때문에, 제가 영어로 말을 걸면, 그녀가 일본어로 대답하는 우스꽝스런 장면이 계속되었습니다.

서로가 상대의 뜻을 더 잘 알기 위해서, 온몸의 신경을 집중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상대의 몸짓과 표정, 입술과 두 눈을 놓치지 않고 바라 보아야 했습니다. 도저히 서로의 뜻을 알아내지 못했을 때에는 수첩을 꺼내들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아주 바보같은 그림들이었지만, 저도 그녀도 너무도 오랜만에 그려보는 그림들이었기 때문에, 서로가 그려놓은 그림을 보곤 한참을 웃곤 했습니다.

처음보는 사람에겐 별로 상냥한 사람이 아니었던 저였지만, 마음을 탁 놓고 대하는 그녀의 모습은 제 안에 있던 인간을 감동시켰습니다.

그녀는 제게 이번 스키여행에서 찍은 사진들을 보여 주었습니다. 스키복을 입고, 하얀 설원위에서 그녀는 혼자 서있었습니다. 세상의 근심은 하나도 없이, 모든 것을 다 받아 들이겠다는 환한 표정으로... 그래서 였을까요? 어쩐지 전 그녀가 이 북쪽의 눈과 너무도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습니다.

"여자의 인상은 이상하리만큼 청결했다. 발가락의 오목하게 들어간 곳까지 깨끗할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첫여름의 산들을 보고 온 자신의 눈 탓일까 하고 의심했을 정도 였다."

- 川端康成의 '雪國' 中 시마무라와 고마코의 첫만남.

눈 - 4

가파른 산 등성이에 스키장이 아슬아슬하게 걸쳐 있을 정도로 높은 산허리가 걸쳐 있었지만, 의외로 에치고 유자와 마을엔 밝은 햇빛이 들었습니다. 태양빛을 받자, 눈들은 못이기겠다는 듯, 그 하얀 몸에서 물을 뚝뚝 떨궜고, 눈 마을까지 찾아온 나도 저렇게 사그러드는가 싶어, 몸과 얼굴을 매만져 보았습니다.

새벽부터 오늘 아침까지 아무것도 먹은게 없다는 걸 생각한 나는 아가씨에게 식사 대접을 하기로 했습니다. 아가씨와 나는 동네 식당 몇군데를 돌아다녀 보았습니다만, 식당 문앞엔 어김없이 '준비중'이라는 간판이 걸려 있었습니다. 할 수없이 우리는 다시 역으로 돌아와, 역 구내 식당에서 식사를 했습니다. 나는 가쯔동을 먹었고, 아가씨는 우동을 먹었습니다. 하얀 김이 연신 그녀의 하얀 볼을 어루만졌습니다.



나는 밥을 먹으며, 이번 여행의 의미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만, 딱히 뭐가 뭔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딱히 세상에 대해 내가 뭐라 말하고 싶은 생각도 없었습니다. 이런 일까지 설명하려 든다면 정말 바보가 아닐까 싶었습니다. 모든 일을 투명자를 대고, 이리저리 재보는 나의 어떤 성격의 일부와 전혀 엇나간 일을 한다는 것은, 일평생을 사는 인간이라면 당연히 갖고 있어야 할 증표가 아닐까 싶기도 했고, 그건 나름대로 의미가 있을법 했습니다.

아가씨가 내 눈을 바라보며 '왜 이 추운곳까지 왔죠?'라고 물어왔을때도 내가 해 줄 수 있는 말은 없었습니다. 쑥스럽게 낡은 책을 꺼내 보여줄 수 밖에... 그녀는 여전히 내 눈을 바라보며 고개를 한 번 끄덕여 보고는 천천히 잔잔한 물가같은 미소를 지어 보였습니다. 그것은 아주 아름답고 투명한 미소였기 때문에, 나는 그녀가 분명 좋은 사람일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열시 반이 넘어가자, 곳곳에선 눈이 녹아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날씨는 화창하고 따뜻했습니다. 물이 녹아 도로 곳곳에 작은 수로가 만들어 졌습니다. 눈 녹은 물은 아무런 때도 묻지 않았습니다. 투명하고 맑은 계곡물과도 같았습니다.

그녀도 길을 서둘러 떠나야 했습니다. 역앞에서 내게 잠깐 기다리라고 하고는 어딘가로 뛰어갔다가 잠시후 나타났습니다. 그녀의 손에는 니가타 지방의 송편이 들려 있었습니다.

"이 지역 사람들이 많이 먹는 거에요. 선물.."그리곤 내게 상자를 내밀었습니다.



난 눈이 녹아내리는 소리를 들으며, 그녀의 찰랑거리는 머리카락과 뒷모습을 보고 있었습니다. 기차 개표소를 지난 그녀는 내게 손을 한 번 흔들고는 이내 내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습니다. 어두컴컴한 역 밖을 나오니 햇빛은 더욱 환하게 내 얼굴을 비추어 왔기 때문에, 선글라스를 썼습니다. 햇빛이 흰눈과 반사되어 마을 전체가 온통 환하게 빛나고 있었습니다.

제가 체크인 하기로 한 시간이 오후 2시 정도 였기 때문에, 전 남아도는 시간 동안 마을 곳곳을 다닐 수 있었습니다. 마을은 눈고장 답게 곳곳에 수로가 잘 발달되어 있었고, 그곳을 따라 눈녹은 물이 시원스럽게 내려갔습니다. 마을 안쪽에선 어떤 남자가 집 지붕위에 올라가 눈을 치우고 있었습니다. 눈을 한 삽 퍼서 내 던질때마다 흰 눈덩이는 큰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졌습니다.




'길 옆에 있는 마을로 들어서니, 조용히 떨어지는 낙수물 같은 소리가 들렸다. 처마 밑에 매달린 조그마한 고드름이 귀엽게 빛나고 있었다. 지붕에 쌓인 눈을 쓸어 내리는 사내를 올려다 보고, "여보셔요, 하는 김에 우리집 눈도 좀 치워 주시지 않겠어요?"하고 목욕하고 돌아가는 여자가 눈이 부신 듯이 젖은 수건으로 이마를 닦았다. '

-[雪國] 川端康成 中-

눈 - 5

난 마을 안쪽에 있는 드 넓은 눈밭을 발견했습니다. 그곳은 걸을때마다 무릎까지 빠져들었습니다. 흰눈밭 너머에는 사진에서 봤던 부드런 능선의 산이 서 있었습니다. 가슴이 얼어붙는 듯 우뚝 서버리고 말았습니다.

찬 바람이 내 볼을 세차게 문지르고 지나가고, 머리결을 흐트러뜨리고 지나갔습니다.

그렇게 이상한 집념에 사로 잡혀, 마주하게 된 설국의 산은 나를 조용히 내려다 보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마치 나를 이곳까지 이끌게 한 어떤 미지의 힘과의 대면과도 같은 것이었기에 내 머리속은 눈처럼 하얗게 비워진채, 흐르는 구름과 바람소리, 눈소리로 어울어진 자연속에 화석처럼 남아있었습니다.

설국이란 소설을 처음 접하게 된것은 대학교 일학년, 혹은 이학년때일입니다. 노벨 문학상 수상작이란 이름과 걸맞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은 서구인의 오리엔탈리즘이다라고 단정하기도 했습니다. 난 실제로 정치적인 의미의 제국주의가 문화 제국주의를 전제로 하듯, 일본 문학의 세계시장에서의 영향력을 제국주의 또는 정치적 패권주의와 관련지어 해석해보려는 논문을 쓰려고까지 했었습니다.

하지만, 내가 신봉하는 "물리적 시간은 본질을 변화시킬 힘을 갖는다"라는 또 하나의 신조가 이 작품에서도 자연스럽게 힘을 발휘하게 되었습니다. 십여년에 걸쳐 쓴 이소설은 읽으면 읽을수록 작가가 켭켭이 쌓아놓은 시간이 천천히 옷을벗으며 그 신비하고 아름다운 몸을 천천히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주인공 시마무라는 무위도식하는 무용평론가입니다. 본 적도 없는 무용을 서양책 몇권읽고 평하고 책을 내는, 그래서 자신 스스로도 이 일에 대해 회의하는 사람입니다. 시마무라에겐 모든 일이 '헛수고'로 비추어질 뿐입니다. 이런 시마무라가 겨울마다 설국을 찾게 되는 데에는 설국에서 만나게 된 게이샤(기생) 코마코 때문입니다.

이 소설에서 코마코는 순수하고 때묻지 않은 영혼의 소유자로 나오고, 그 점이 눈으로 뒤덮힌 니카타고장과 어울려 몽환적인 분위기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시마무라가 코마코에게 할 수 있는 말이란, "헛수고야"라거나,"난 아무것도 해 줄 수 없는걸..."이란 말 뿐입니다.

코마코와 애증관계에 있는 또하나의 인물 요오코는 눈 나라를 표상하는 또하나의 인물입니다.

눈이 없는 눈고장은 눈이 없을땐 아무도 찾지 않습니다. 하지만 눈이란 존재감도 없고 형체도 없습니다. 빛이 들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고, 아무도 그 모습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이렇듯 눈세계에 사는 코마코와 요오코 역시 애달픈 나름의 인생을 가지고 있지만, 눈과 같은 존재라는 것을 아는 시마무라의 눈엔 그녀들과 자연과 같은 거리감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요오코가 소설의 마지막에 영화를 상영하던 누에고치창에 불이 나, 죽게 되는 장면에서도 확인이 됩니다. 시마무라가 그녀의 죽음에도 밤하늘의 별빛을 보고 감동하게 되는 이유는 앞서 말했듯, 이미 그녀들은 현실의 세계가 아닌 눈세계로 표상된 또 다른 허무한 세계의 시민이기 때문입니다.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피고 지는 애달픈 인생들의 모습속에서 어쩔수 없는 깊은 허무를 발견한 것입니다. 그것은 눈처럼 곧 녹아 없어지지만, 눈이 없으면 아무도 찾지 않는 설국처럼, 번번이 도시로 나가고 싶지만 나갈수 없는 코마코와 요오코의 불안감처럼 역설적인 존재감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허무하게 없어질 눈이지만, 눈이 없으면 존재할 수 없는 설국은, 모두 다 죽게 되는 허무한 인생들인 우리들이 모여, 다시 허무한 이 세계를 이루고, 그것이 그 자체로 의미를 갖게 되는 서글픈 역설을 말해줍니다.

모든 것이 헛수고인 인생사에 있어, 그가 택한 삶의 태도는,또는 그가 택할 수 밖에 없었던 삶의 태도는 '바라보기'인 것입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이 하나 둘 씩 우리곁을 떠날때에도, 더 이상 슬퍼하지 말자. 그들의 눈처럼 녹아 없어지는 허무함속에서도 그 허무함이 이루어내는 것이 결국 그들의 존재였음을 잊지 말자라고 작가는 눈물을 흘리며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가슴이 너무 아프지만, 작가는 울지말고, 밤하늘의 별을 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비켜요 비켜줘요!"

코마코의 부르짖는 소리가 시마무라에게 들려왔다.

"이애 미쳤어요,미쳐!"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가 미친 듯한 코마코에게 시마무라는 다가가려고 했으나 요오코를 코마코한테서 받아 안으려고 하는 사나이들에게 떼밀려 비틀거렸다.

발에다 힘을 주어 버티고 서서 눈을 쳐든 순간, 쏴아 하고 소리를 내면서 은하수가 시마무라의 몸속으로 흘러내리는 것 같았다. '

가와바타 야스나리 작 <설국> 마지막 페이지 마지막 글.

-End-


후기

여섯번째 글에서 끝을 맺은 이 글들은 제 인생의 이정표에 있어서는 매우 의미있는 여행이 되었던 삼박사일간의 니카타여행을 정리한 것입니다.

한번쯤은 어떤 식으로든 정리해야 겠다라고 생각하던 이야기이기 때문에, 써보았습니다.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후에 가스파이프를 입에 물고 자살하게 되는 불행한 사람입니다. 하지만, 전 그가 나름의 성실한 삶을 살았음을 인정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의 글을 읽으면 이 불행한 사람의 상처받은 영혼이 글자 한자 한자에 선연한 빛을 띠고 반딧불이처럼 마음속으로 날아듭니다.


하지만 어쩌면 좋을까요?
전 제 자신에 깊게 실망했고, 끊임없이 타인에게 상처를 주게 되는게 두려워 견딜수 없을때가 많음에도, 한발자욱도 앞으로 내지 못하고 쓰러져 있습니다.

이 서글픈 인간의 습성을 이야기 했던 작가와는 다른 길을 걸어야 겠지만 늘 마주하게 되는 사람들과 나와의 관계속에선 어쩔수없이 눈과같은 기이한 존재감이 저를 억누릅니다.

강원도 산골에서는 눈의 무게로 지붕이 내려앉고 집이 무너진다고 합니다. 그런식으로 내려앉는 무서운 허무는 자신이 알지 못하는 새에 우리를 깔리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아직까진 눈이 주는 포근함과 처연한 정겨움에 전 그저 방문을 연채, 하얀 입김을 내며 눈 내리는 설국을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습니다.

- End -




이동수 :: 군대에 있을 때 눈이 내리는 저녁에 부대 앞 산을 무심코 보았를 때...
아... 왠지 모를 전혀 다른 모습의 산.
그 때 갑자기 설국이라는 단어가 제 머리속을 지나 가더라고요.
2달 뒤 제대후 설국이라는 책을 사 읽어 보았습니다.
그래서 언젠가 한 번 꼭 가 보고 싶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신문에서도 설국과 그 배경이 된 마을에 대해 소개도 하고 그래서 좋은 느낌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 알게 된 여자 친구와 함께 시험이 끝난 후 일본에 한 번 갔다올 생각 입니다.
그 때 그 느낌 잊을 수가 없군요...
내일 다시 추워진다고 하는 군요.
추위가 주는 신비한 느낌을 느끼고 싶습니다.
2005/01/28  
snowcountry :: 정말 아름다우면서도 조용한 고장입니다. 그런데 지난해 지진피해 때문에, 야스나리가 글을 썼던 산정호텔도 복도가 무너지고, 에치고 유자와 마을도 꽤 큰 피해를 입은 모양입니다. 복구가 잘 되고, 그 마을 사람들도 무사하길 기원할 뿐입니다.

P.S) 만화 못말리는 짱구(크레용 신짱)에서, 짱구네 유치원생이 스키여행을 가는 곳이 에치고 유자와더군요. ^^
2005/01/30  
이동수 :: 지진으로 피해를 입었다니 마음이 아프군요.
전에 뉴스에서 심각한 지진이 발생했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그 곳이 피해를 입을 줄은...
에치고 유자와에 대한 자세한 정보를 알고 싶습니다.

P.S) 저 짱구 무지 좋아 합니다. 생각없이 보면 어린 아이처럼 재미있지만
저런 내용을 저 정도로 심도있게 아이의 기준으로 만화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이...
정말로 일본이 만화 강국이 될 수 밖에 의미있는 만화 입니다.

어제 지하철을 타고 천안에 갔다 왔는데 평야를 지나는 기차처럼
여행한다는 느낌을 오랜만에 느꼈습니다. 즐거운 지하철 여행이었습니다.^^*
2005/02/06  
179  [병가기록] 16일  마담뮤즈 2015/01/26 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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